[Why 평화교육 X How 자원봉사?] 마지막.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우리의 존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어렵지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스스로 평화를 찾아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나다 앨버타대학은 닭의 크기가 50년 전보다 무려 4배가 커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닭의 몸집이 커진 이유인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그들의 몸집을 급격하게 불리기 위해서 어떤 방법들이 동원 되었을까? 그 급격한 성장 속에서 닭의 짧은 생애는 얼마나 불행했을까?

 

국의 교육에서 청소년들은 닭장만큼이나 좁은 책상머리에 갇히도록 설정되어 있다. 스스로의 목소리와 제 속도, 제 걸음을 찾아 그 좁은 우리를 벗어난 멋진 친구들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들이성공이라는 결과로 돌아올 것이며 이 모든 통제가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위로와 더불어 제한된 자유 안에서 성장한,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표출할 여력도 없는 청춘들이 대량생산되고 있다. 다수의 아이들이 다른 선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주어진 틀 안에서 복종하는 몸을 획득하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단 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직장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닭장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많은 공장 식 축산이 그러하다. 존재로 하여금 존재하지 않을 것을 강요하는 시스템. 살아있으나 살아있지 않은 존재들로 가득 찬 우리.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돼지사육의 경우, 돼지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비좁은 우리 안에서 평생을 산다. 파란 하늘을 볼 일이 전혀 없는, 초록의 식물도 만날 일이 전혀 없는 어두운 우리 안에서 살다 처음으로 우리 밖을 나서는 날은 도축되는 날. 그렇게 도살장을 향해 생의 첫 걸음을 내딛던 돼지들이 자신의 체중을 견디지 못해 발목이 부러지는 일들도 빈번하다. 우리 사회는 다른가? 교문을 나선 아이들의 발목이 부러져 넘어지고 쓰러질 때 어른들은 말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나약하고 게으르다고.

참으로 괴상하다. 열심히 가르쳐서 배웠는데, 그렇게 주입해 준 그 지식들은 어째서 우리가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하지 못하는가?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암기했던 그 지식들은 어째서 그다지 쓸모가 없는가? 존재를 증명해내야만 하는 피곤한 지금의 사회에서 도대체 내가 되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스펙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커리어가 한 곳으로 모여드는 사회에서 스펙을 빼고 남는 나는 누구인가?

 

는 세계화, 글로벌 이런 말들을 들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TV로만 보던 아프리카에 실제로 가서 내가 직접 경험하고 싶다며 자원봉사활동을 결정할 때의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아프리카의 한 국가에 가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우간다 현지에 도착해 내가 직면한 것은 내가 실로 별것 아닌 사람이며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딱히 기여할 바가 없다는 황당한 사실이었고, 게다가 누가 오란 적도 딱히 없었는데 혼자 어떤 사명감에 사로잡혀 이곳까지 왔다는 황망함이었더랬다. 현지를 떠나기 전 그 곳에서의 시간을 정리하며 혼자 적어 내려갔던 일기장엔 이런 말이 남아있다.

 

“어떤 무엇으로 도움이 되었을는지는 아직도 전혀 모르겠으나 내가 이들로부터 받은 환대와 애정으로 나의 존재가 풍성해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저 나는 내 보잘것없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경험을 위해 이곳에 왔던 것으로.” 

 

년 전,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숫자를 열심히 계산하며 일하다보니 어느 순간 숫자 뒤의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그것이 너무나 괴롭고 힘들다. 나는 사람이라는 그 단어를 살짝 지우고 존재라 고쳐 쓰고자 한다.

 

우리보다 못 살아 불쌍해 보인다며 바다 건너 어떤 국가의 사람들을 걱정하기 전에 한국사회는 한국사회를 진심으로 걱정해야 한다. 존재의 소멸과 고통이 아무렇지도 않은 정치적 싸움의 주제가 되고 소비될 수 있는 이 무서운 사회를 직시해야한다. 정말 가난해서 콩스프에 옥수수 가루떡을 찍어먹거나 때로는 그 음식도 없어 옥수수죽만 먹으면서 소일하더라도 동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의 나는 풍족했다. 무엇이 진정 잘 사는 삶인가? 보이지 않는 곳에 하루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을 때, 우리는 여전히 한국사회가 잘 살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질적으로 풍족해진 만큼 빈곤해진 영혼들로 가득한 이 내리막의 미끄럼틀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존재하듯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러함을 어찌 온 몸으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숫자 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 고깃덩이 너머의 살아있었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일은 존재의 무게가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가벼워져 버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해내야만 하는 수행이 아닐까?

 

줄줄이 스펙을 쌓는 일 외에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잘 보이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서 모든 경험은 스펙이라는 깔때기를 타고 흐른다. 스펙이 될 수 없는 경험은 무엇인가? 스펙이 설명해낼 수 없는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무엇으로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스스로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생각한다. 누구의 어떤 강요도 없이 오롯이 스스로 움직이는 몸에 대해 생각한다.

 

 

 

쟁을 위해 결기하지 않겠다는 겁쟁이들의 몸에 대해 생각한다. 전쟁이 무서워 도망치다가도 부당한 폭력에 직면했을 때 빈손으로 맞설 수 있는 몸에 대해,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다른 존재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살아갈수록 세상에 해가 되는 인간 중 그저 한 명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의 뜻으로 움직여나가는 복종하지 않는 몸을 되찾는 일이 평화라 생각하며 그를 위해 이 가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지 한껏 열린 질문들로 이 글을 닫는 것에 갈음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자원이자봉이 서울시자원봉사센터블로그

티스토리 툴바